3차 선교여행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은 육로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가 갈라디아와 부르기가 지방에 그가 설립한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선교 사역은 에베소에서 시작 되었다. 그곳은 소아시아 동부 지역의 중심 도시였다. 그는 먼저 회당의 ㄹ중심으로 3개월간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고 권면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대적했다. 그래서 그는 두란노 서원을 거점 삼아 2년 동안 복음을 전하여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했다. 거기서는 많은 이적들도 나타났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을 거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원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괴가 떠날 정도였다.
에베소에서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선동하여 은장공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은으로 아데미 신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경제적 부를 누리고 살았는데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그들의 영업이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요는 하나의 우발적 사건으로 끝났다. 복음과 능력과 우리 주님의 권능은 그런 사탄의 획책을 철저히 무력화 시켰으며 그리하여 3년에 걸친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는 자기 앞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냈다 그는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표는 로마와 스페인까지 가서 선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방문 계획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 고생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선교한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 활동을 하여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마케도니아로 가 교회들을 방문하고 아가야 지방으로 내려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그곳 소식을 듣고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을 모색했고, 미리 보냈던 디도 편에 그곳 소식을 듣고 다시 서신을 보내 권면했다(고린도후서).
그리고 집접 그 지방으로 가서 고린도에 들렀다. 그는 거기서 배를 이용해 바로 수리아로 갈 계획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박해가 시작되어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로 건너갔다. 드로아에서는 밤늦도록 그의 강론을 듣던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어 다시 살리는 일도 있었다. 아가 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예고하면서 가지 말라고 말류 했다. 그러나 그전에 부울이 자신이 성령의 지시시함심을 받은 일이 그 모든 것들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서 체포 수감될 것을 예상했지만 주님을 위해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다고 그의 결심을 확고히 했다.
그의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에로 인도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결국 그것이 기됵교를 유대인들의 종료가 아니라 만민의 종료로 발전할 숭 있도록 그 기틀을 ㄴ호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그와 그이 선교단은 수많은 반대와 박해도 경험해 보았다. 그는 그동안 또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선교단에 합류하여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복음 사역은 그런 후배 사역자들을 통해 계속되라라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개척해오던 지역들의 교회들과 선교 활동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새로운 곳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역은 계속되어 왔고 복음은 전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서 오늘에 일렀다.
죄수로 수감된 바울
예루살렘에서 돌아오자 아가보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야고보와 교회의 장로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그의 등장을 또한 교회를 긴장에 휩싸이게 하였다. 그를 적대하던 사람이 그가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말을 퍼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바울도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그대로 실행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바울에게 이방인을 성전에 들어가게 해서 더럽혔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하여 폭행을 가하기까지에 일렀다. 그러나 치안은 책임진 로마 구의 천부장 루시아가 나섬으로써 일단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천부장은 바울을 그 마을에서 구해내도록 했고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인 것을 들어 알고는 적극 보호하게 되었다. 그는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밤을 이용하여 그를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로 안전하게 호송해주었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고발을 받고 벨릭스 앞에서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되었다. 벨렉스는 그럴 만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염려하려 최종 결심을 미루었다. 여전히 바울은 미결수로 겨기에 수감되어 있었다.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다시 바울을 고발했다. 헤롯왕이 되어서야 바울은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결국 바울은 비록 죄수라는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바라게 된 로마로 갈 수 있었다. 로마에서의 바울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조금 소개 되어 있다. 그는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감옥에 갇히는 대신 그가 얻은 셋집에 감금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동안도 그의 복음 사역을 결코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
사도행전 이후의 바울
사도행전의 가록은 그가 로마의 셋집 감금 생활을 2년 동안으로 끝은 맺는다. 바울은 감금생활 뒤에 얼마 동안 자유로운 몸으로 선교를 했을 것이다. 그 기간동엔 그는 에베소를 위시하여 마케도니아 지방을 돌아보고 스페인까지도 방문했으리라고 보기도 한다.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한 것이 바로 이 기간이었고 그 후에 다시 반기독교 운동과 박해의 여파에 휩쓸려 로마에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할 때 디모데 후서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네로의 박해가 심각하게 진행될 때 그 박해의 와중에 순교의 제물의 되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갖은 사람이었으므로 십자가 형이나 화형이 아닌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을 것이다.
바울의 신앙과 신학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선교사 목회사 그리고 신학자였다. 흔히 그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을 한 사람으로 키나 체구가 크지 않고 볼품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온몸에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질병인지는 알 수가 없고 눈이 나빠서 편지를 쓸 때도 대필을 썼다고 전해진다. 다메섹 도상에서 본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고 그 수많으 ㄴ고난 가운데 많은 일을 감내하면서도 질병에 시달리거나 몸이 약해 주언진 일을 감당하지 못한 일은 없었을 만큼 강인한 체력을 갖은 사람이었다. 그는 신양 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을 썼을 정도로 교회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기초를 놓은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의 정신력과 신앙, 그리고 신학은 예수께서 명하신 세계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고 그의 신학과 사역은 기독교를 세계화시키는 출발점을 제공하였다. 그의 신앙과 신학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출발되고 하나님에 의해 행하여지며 또한 이루어 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느 ㄴ일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함으로 동참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그것 마저도 하나님꼐서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며 또한 우리의 고백이다. 그는 구원에 관한 한 하나미의 예정을 철저히 믿었다. 흔히 말하는 예정론이라는 말은 언제나 구원과 같은 말이다. 오늘 누군가가 감기에 걸리는 일 같은 섯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땅 위에서 겪는 구원 이외의 모든 일은 하나미의 섭리하심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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