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 그의 이름은 곧 ‘배신’을 뜻하는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드라마와 문학, 설교와 교리 속에서 그는 단순한 반역자, 돈을 밝히던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정말 유다는 단지 은 30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을까?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든다. 왜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택하셨을까? 유다는 왜 회개 대신 자살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의 배신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글은 그 질문들에 대해 신학적이면서도 인문학적인 깊이로 접근하려 한다.
가룟 유다는 진짜 수제자였을까?
성경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6장 13~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택하시며 그 중에 가룟 유다도 포함하셨다. 그는 단순히 따르는 무리 중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역의 동역자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공동체의 돈궤를 맡은 재무 역할까지 감당했다(요한복음 12:6).
그는 단순한 엑스트라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제자 자리에 두셨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간의 악함까지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신다는 깊은 신비를 마주하게 만든다.
은 30과 배신 – 탐욕이 전부였을까?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액수는 당시 노예 한 명의 가격에 불과했다. 정말 유다가 단순한 탐욕 때문에 이 일을 저질렀다면, 금전적 이득이 너무 작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유다의 배신 동기가 더 복합적이고 심리적이며, 정치적인 배경까지 포함된 것으로 본다.
유다는 메시아 혁명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1세기 유대사회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의 압제를 무너뜨리고 다윗의 왕국을 회복해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열심당원 출신 시몬도 있었다. 열심당은 당시 무력투쟁도 불사했던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유다 역시 이런 배경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고 군중의 인기를 얻었지만, 정작 로마에 대항하지 않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하며 오히려 비폭력과 자기희생을 가르치셨다. 유다는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이제는 드러나셔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체포 상황으로 몰아넣으면, 결국 하늘에서 불을 내려 로마를 치실지도 모른다… 그런 오해와 왜곡된 충성심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왜곡된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침묵으로 순종의 길을 가셨다. 유다는, 자신이 한 행동이 진짜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유다의 회개는 진짜였을까?
마태복음 27장 3절은 유다가 “예수께서 정죄되신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돌려주려 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서 ‘뉘우쳤다’에 사용된 단어는 metamelomai로, 이는 ‘슬퍼하다’, ‘후회하다’에 가까운 말이다.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진심으로 통곡하며 회개했는데, 그때 쓰인 단어는 metanoia, 즉 ‘마음의 방향을 바꾸다’라는 진짜 회개의 개념이다.
유다는 죄를 슬퍼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결국 절망을 선택했다. 은 30을 던지고,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은 깊은 비극이다.
유다 안에 들어간 사탄 – 영적 공격과 책임의 교차
요한복음 13장 27절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니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악의 충동만이 아니라, 유다가 이미 탐욕과 실망, 왜곡된 기대를 품었기에 사탄에게 틈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임은 사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자발적으로 허용한 내면의 문에 있다.
사탄은 틈을 노린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고(요 6:70) 유다에 대해 언급하셨다. 이는 제자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이자, 하나님 앞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은 함께 간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사람”이라고 하시며, 유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의 성취임과 동시에 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동시에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6:24).
이는 요셉의 고백과도 닮아 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창 50:20)
하나님은 유다의 배신이라는 최악의 악도 구원의 문으로 사용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유다를 의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자유의지, 이 두 긴장은 끝없이 함께 작동한다.
유다는 나인가? –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단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유다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 예수님을 나의 기대대로 조종하고 싶을 때,
- 그분의 길이 너무 느리고 손해 보는 것 같을 때,
- 실망감과 좌절이 쌓여 신앙이 메마를 때,
- 죄를 슬퍼하면서도 회개 대신 자책만 할 때,
그 순간 우리는 ‘유다의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유다와 다른 기회가 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와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돌이켜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용서하리라.”
유다를 통해 드러나는 십자가의 신비
유다는 비극적 인물이었고, 그 인생은 '배신자'라는 꼬리표로 끝났다. 하지만 그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구속이라는 궁극의 선을 이루셨다. 유다의 선택은 용납되지 않지만, 그 악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경외케 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누구도 설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 곁에 있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는 이들에게,
유다는 조용히 경고하고 있다:
“너는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향유와 유다 – 진짜 예배와 위선의 경계선
요한복음 12장 1절부터 6절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 그분이 십자가를 지기 전 엿새 전의 중요한 장면을 보여준다. 장소는 베다니, 바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그 마을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서 잔치를 베푸신다. 이는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 생명을 받은 나사로와 그의 가족이 드리는 감사와 경배의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마리아는 특별한 행동을 한다.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다. 이는 당시 관습으로도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며, 헌신과 경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 향유는 약 300데나리온, 즉 일 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고가의 것이었고, 마리아는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목소리를 낸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 12:5)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지적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어서 유다의 진심을 밝힌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 12:6)
유다는 겉으로는 사회적 정의와 자선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탐욕을 포장한 위선자였다. 예수님은 그 위선을 간파하시고, 마리아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옹호하신다:
“그녀가 내 장례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였다.” (요 12:7)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마리아의 행위가 죽음을 준비하는 예언적 헌신이었음을 드러내는 말씀이었다.
마리아와 유다의 대비 – 사랑과 계산, 예배와 위선
이 장면은 참된 예배자 마리아와 계산적인 종교인 유다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 마리아는 모든 것을 드림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그녀의 예배는 향유처럼 흘러넘쳤다.
- 유다는 경제 논리를 앞세워 사랑을 억누르고 평가했다. 그는 ‘비효율적 사랑’을 비난했다.
-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는 낮아짐을 택했지만, 유다는 교묘한 언어로 사람을 판단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받는다:
나는 지금 예배하는가, 아니면 계산하고 있는가?
신학적 의미 – 예배는 언제나 향기를 남긴다
요한복음 12장 3절은 “집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더라”고 말한다. 마리아의 헌신은 향기처럼 퍼졌다. 이것은 예배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것이며, 그것이 사랑의 행위일 때 사람의 마음까지 채운다는 깊은 상징이다.
반면 유다의 말은 냉소였고, 향유의 향기를 끊는 듯한 말이었다.
예배를 멈추게 하는 자는 늘 ‘합리’와 ‘자선’을 말하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중심적 탐욕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 마리아인가, 유다인가
오늘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찬양과 눈물로 예배드리고, 누군가는 그 헌신을 가성비로 따진다. 교회 안에서조차 마리아와 유다가 공존한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고, 유다의 말을 꾸짖지 않으셨지만, 무시하셨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 유다는 더욱 어두운 길로 들어섰다.
예수님 앞에 선 우리,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누구인가? 마리아처럼 향유를 쏟아 붓는 자인가,
아니면 유다처럼 예배를 계산하는 자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예배는 사랑이고, 사랑은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의 마지막에,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가룟 유다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고, 그의 기적을 체험했고, 그 발을 따라 다녔지만 결국 마음 깊은 곳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돈은 그에게 있어 삶의 기준이었고, 판단의 잣대였으며,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끈 우상이었다.
예배의 자리에 있어도, 제자의 자리에 있어도,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삶의 끝은 전혀 다르게 흐른다.
오늘 우리의 마음 속 주인은 누구인가?
마음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주인도 거기 있다.
또 다른 배신자들 – 베드로와 제자들의 연약함
가룟 유다는 가장 상징적인 배신자이지만, 성경 속에는 다른 형태의 배신 혹은 부인을 한 제자들도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드로이다.
●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예수님이 체포되신 그 밤, 베드로는 예수님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마태복음 26장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했다.
- 처음엔 여종의 질문에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 두 번째엔 맹세하며 부인하고
-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부인했다
이 장면은 유다의 배신과는 또 다른 인간적인 두려움, 자기보호 본능, 상황의 압박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친 후 밖으로 나가 통곡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부르시고, 세 번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으로 회복시키신다. 이는 진심 어린 회개가 어떤 회복을 불러오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 다른 제자들의 도망
마태복음 26:56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가룟 유다만이 예수님을 배신한 게 아니었다. 베드로는 부인했고, 나머지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예수님을 버린 것이다. 그들은 함께 있었지만, 고난 앞에서 두려움과 혼란 속에 무너진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책망하기보다 부활 이후 다시 찾아오시고, 용서하시고, 사명으로 회복시키셨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완벽한 신실함’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붙드시고 다시 세우시는 분임을 말해준다.
유다와 베드로, 무엇이 달랐는가?
- 유다는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의 기준과 실망, 탐욕이 앞섰고, 죄책감 속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다.
-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눈빛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통회했으며, 결국 용서와 사명으로 회복되었다.
두 사람 모두 죄를 지었지만, 유다는 후회했고, 베드로는 회개했다. 이 작은 차이가 영원한 결과를 갈랐다.
우리도 실패한다. 하지만 회개는 다르다
우리도 유다처럼 실망하고, 베드로처럼 두려워하고, 제자들처럼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어디로 돌아가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무너진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찾으신다.
유다처럼 무너질 수도,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그 차이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용기에 달려 있다.
-세우신교회 정재환 목사님 설교말씀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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