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 시대에서 와정 시대로
사울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다. 가나안 지방을 둘러싼 주변에서는 거대한 제국들이 무너져 힘의 공백이 생겼고, 그틈을 타서 이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내적인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고셍서는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막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철기를 제작하는 신기술이 모두에게 공유된것은 아니었다. 블레셋과 같이 해안에 위치하여 선진 문명을 비교적 쉽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집단은 가장 먼저 철을 사용하여 농기구와 무기들을 제작했지만 산간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브렐셋인들은 이 기술이 알려지면 아무나 칼이나 창을 만들까 우려하여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따라서 이스라엘 인들은 철을 사용하여 보습이나 삽 혹으 도끼나 괭이 같은 기본적인 농기구를 제작하는 기술도 보유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을 버릴 때에서 블레셋인들을 찾아가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블레셋과 전투할 떄 사울과 요나단을 제외하고는 그들과 함께 있던 백성들에게 칼이나 창이 없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이스라엘 인들은 블레셋인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피해를 입을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은 블레셋이외에 요르단 강 동쪽의 암몬과 모압, 남쪽의 아말렉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으로 나위어 통합된 세력을 이루지 못하였고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부족 단위로 사사라는 일종의 제정일치적 형태의 지도자가 있었을 뿐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외보로부터 강력한 위협이 발생했을 떄 인근의 지파 세력들을 규합하여위협을 극복하는 리더십을 보이기도 했따. 그러나 사사 삼손이 그 영웅적인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블레셋이 끌려가서 죽읆을 당한 일화는 사사시대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스라엘 인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 처럼 자기들도 왕을 가지기르 원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곤경도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왕의 출현은 단시일 안에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였따. 우선 남쪽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파들이 광범위하게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어서 각자 지역적인 독립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접경하는 지역에서는 자주 다툼도 일어났고 그것은 떄로는 거의 전면적인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부족적인 분권주의의 힘이 여전히 강하게 작도하는 상황에서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출현을 바란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도 할수 있다. 따라서 이와같은 사사시대의 분권주의가 청산되고 원권이 확립된 새로운 시대로 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사울과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실로의 엘리, 리마의 사무엘 등은 모두 사사였다. 성경에 엘리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였으며 사무엘이 늙자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사울 역시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마치 사사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직접 제사를 주관 하기도하고 예언을 말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사사의 시대에서 왕의 시대로 넘어가는 어중간한 지점에서 자신의 두발 가각을 하나씩 서로 다른 지점에 두었던 인물이라고 할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 자신도 아직 왕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그의 비극은 피할수 없었다.
사울의 등장과 왕으로의 즉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 전체는 사무엘과 다윗이라는 두 사람의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세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일화들은 [사무엘서]만큼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드물것이다.
사무엘, 사울 , 다윗이 세사람의 인생이 서로 교차하다가 멀어지고 마지막에 가서는 적이 되어 싸우는 기묘하고 극적인 삼중주가 전개되고 있다. 사무엘서의 작가는 성경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역사속의 실존 인물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과 긴장감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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